작가 장승택(張勝澤, 1959-)의 세계를 알고자 할 때, 핵심에 자리하는 개념은 최상의 키워드이자 수식인 ‘겹회화’, 즉 레이어드 페인팅(layered painting)이라는 고유 용어(original term)이며, 이 용어의 올바른 해석에서 작가의 온전한 이해가 도출될 수 있다.
장승택이 본래부터 ‘겹회화’를 구사한 것은 아니다. 2020년 무렵부터 세간에 유명해진 이 연작 이전에 작가는 트랜스페인팅(Trans-Painting)이라는 개념으로 현대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작가가 2010년대 이전에 발표했던 <무제-트렌스페인팅(untitled-transpainting)> 연작은 알루미늄 패널 위에 여러 겹의 강화유리를 얹고, 그 사이에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끼우거나 물감을 더해 깊이의 묘미를 주었던 작품이다. 작가는 ‘변화하며’, ‘넘어선다는’ 의미로서 ‘trans-’와 그림을 뜻하는 ‘painting’을 합쳐 기존 회화 개념을 초월하고자 했다. 회화의 본질은 그간 표현이나 형식, 혹은 평면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가장 권위 있는 논의는 그것의 본질이 붓질(brushstroke)에 있다는 선언에서 빛을
즉, 한 점의 붓질이 단순한 색의 흔적이 아니라, ‘표현적 지시 행위’가 되는 순간, 붓질은 회화, 즉 예술세계로 전환된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붓질(brushstroke)은 예술로서 회화를 성립시키는 해석적 장치의 일부였다. 그런데 작가는 붓질을 초월함으로써 회화의 본질과 조건을 뒤흔들었다. 겹회화는 트랜스페인팅의 연장선이자 완결판이다. 즉, 장승택의 회화는 ‘보이는 것(the visible)’에 대한 질문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겹회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수평으로 제작된 거대한 붓으로 지대한 공을 들여서 면을 칠한 후, 시간을 들여서 말리고, 물로 씻고(세척하고), 기다리고, 다시 오묘하게 다른 색으로 칠하고, 마르기를 기다리고, 다시 씻는 과정을 무수히 거듭해야 한다. 하나의 작품이 이루어지는 데 몇 달의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의 퇴적 속에서 제작하는 작가에게나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미적 속성과 철학적 사유, 윤리적 요청이 함께 다가온다. 색을 칠하는 것(붓질)과 색을 지우는 것(세척)이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이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여기에 이 글의 핵심 내용이 자리한다.
작가의 회화는 색의 층위를 통해 ‘존재하는 것’의 구조를 되묻고, 특수한 붓질과 색채의 반복을 통해 쌓인 구조, 다시 말하면 ‘시간’과 ‘감각’이 잉태하는 협력의 본질을 탐색한다. 작가의 겹회화는 단순한 조형 언어의 탐구가 아니다. 그것은 서구 모더니즘의 규범과 동아시아적 감응의 긴장을 가로지르는 철학적 수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필자는 장승택의 회화를 매개로, 작가를 알게 된 2009년 이래로 작가와 작가의 회화 세계에 몰두해 왔다. 특히, 작가의 세계를 계기로 미국의 여류화가이자 시인이며 뛰어난 미술 이론가인 에이미 실만(Amy Sillman, 1955-)의 「색채에 관하여(On Color)」라는 수필에 녹아있는 깊이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둘째, 미국의 동아시아 미술사학자 마틴 J. 파워스(Martin J. Powers)가 우리 동아시아의 회화사를 분석하면서 동아시아 붓질의 정치학이 어떻게 서양 회화의 저항 혹은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셋째, 장승택에게 가장 중요한 사상의 단서를 제공해 주는 사상가로 우리는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 (Joseph Brodsky, 1940-1996)의 사유를 탐험해야만 한다. 시인이 198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래로, 장승택은 시인의 시를 암송하고 감상하면서 현대미술의 방법론을 탐색했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는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면서 늘 주변인과 이방인의 체험을 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신호, 역사의 지층, 사회의 맥락에 대해 사유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 사상가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 1928-2011)의 논의인 주변적 존재의 ‘투명성의 권리’를 작가의 경험과 회화 세계에 연결하여 사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장승택의 세계가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 1913-1967)의 가부장적 사유에 대한 도전으로 읽기도 했다. 필자는 현대미술가와 철학의 몇몇 사유와의 만남을 통해, 색과 붓질, 투명성과 반복, 주변성과 사유의 윤리를 탐색하고자 한다. 다만, 이번 글은 초안에 불과하며,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장승택에 대한 본격적 논의를 논문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탁월한 화가이자 미술 이론가인 미국인 화가 에이미 실만은 「색채에 관하여(On Color)」라는 글에서 매력적이며 여운이 가시지 않는 주장을 펼친다. 실만에 따르면, 색채는 억압되어 온 감각이며, 여성적이고 장식적인 것으로 폄하되었으며, 그 압박은 여전히 현대미술계에서 진행 중이라고 지적한다. 실만은 색이 비합리적이고 탈이성적인 것이며, 회화에서 색채를 사랑하는 행위는 여전히 일종의 반항이나 저항으로
그런데 장승택 또한 이 반항의 회화적 구현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장승택은 반복적으로 투명한 색을 겹쳐 올려 물감의 존재를 흐리되 지우지 않고, 감각의 층위를 구축한다. 작가의 겹회화는 색의 해방을 통해 회화의 윤리를 다시 묻는다. 색은 이성의 대상을 벗어나며, 감각은 이념에 앞선다. 왜냐하면 서구의 가부장적 모더니즘은 이성을 (권력의) 위계 구조의 최상층부에 안치한다. 따라서 색의 선호는 감각이나 장식 등 하위 범주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서구 모더니즘 회화의 마지막 궁극이라고 할 수 있는 미니멀리즘 계열 회화, 혹은 모노크롬 형식의 회화가 색을 단색으로 절제하거나 색의 남용이나 범람을 금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적어도 모더니즘 회화에서) 여러 색을 사용하는 회화는 여성적이거나 장식적인 회화로 폄훼되었다. 그러나 장승택은 겹회화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서구 가부장적 모더니즘이 억압했던 여성, 장식, 감각의 위계를 재발견한다. 겹(레이어)을 통하여 회화의 조건(평면의 조건)을 다시 묻는 동시에 여성, 장식, 감각의 의미와 이성, 절제, 사유가 갖는 불평등한 하중(荷重), 즉 일본말로 후츠리아이후카(不釣り合い負荷)를 전복하여 재구성한다. 즉, 장승택의 회화는 다색 회화인 동시에 단색 회화이다. 장식적이면서 이성적이다. 궁극적으로 이 둘의 구분이 상쇄되어 모호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판단 정지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그간 유지되었던 보수적이었던 위계의 자물쇠는 작가의 세계에서 풀려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장승택의 회화에서 단순히 시각의 아름다움만을 만나는 게 아니게 된다. 그것은(장승택의 회화 세계는) 시간의 흔적이자 감각의 레이어이며,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적 화해에 대한 강력한 제스처이다.
이에 관련하여 필자는 최근 3년 동안 미국의 동아시아 미술사학자 마틴 J. 파워스의 논의를 애독했는데, 장승택의 회화와 관련해서 파워스가 제공한 붓질의 정치학적 의미를 깨우칠 수 있었다. 파워스는 그의 대표적 논문 「붓질의 문화 정치학(The Cultural Politics of the Brushstroke)」에서 붓질(brushstroke)이 동아시아 회화 전통에서는 단지 조형적 표현이 아니라, 도덕과 존재, 사람됨, 즉 인격의 형식으로 기능해 왔다고
서구 세계에서는 화가의 제스처를 화가의 자아나 신체 표현의 전유(專有)로 귀속한 데 반해, 동아시아의 필획은 관계적이고 윤리적인 수행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장승택의 회화에서 드러나는 붓질은 폭발적이거나 선언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작가는 수십 번, 수백 번의 ‘쌓기’를 통해 감각의 결을 만든다. 이는 일종의 ‘관계로서의 붓질’, 혹은 ‘사유로서 구조화된 필획’으로 읽을 수 있다. 사실, 장승택의 비밀스러운 작업 공정은 지난한 설명을 요구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세계는 긋기, 그리기, 필획의 과정과 세척, 건조, 기다림의 과정이 동등한 위치를 이룬다. 우리는 요임금과 허유(許由)의 신화를 잘 알고 있다. 요임금이 다가오는 죽음을 인지하여 왕위를 허유에게 선양하려고 한다고 말하자, 이를 들은 허유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귀를 물에 씻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에 더해 소를 몰아가던 소부(巢父)가 이야기를 듣고 더럽다며 소에게 그 물을 먹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신비한 이야기, 고사관수(高士觀水)라는 고매한 이야기, 그리고 동아시아 예술 전통에서 회자하는 끝없는 ‘임류상(臨流像)’—곧, 흐르는 물을 응시하며 존재의 이치를 깨달으려는 현자의 도상(圖像)—들은 모두 장승택의 작업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이는 단순한 관조의 태도를 넘어서, 자연과 존재의 흐름 속에서 사유를 획득하는 감각적 수행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작가의 작업은 붓의 흔적을 전면화하지 않음으로써 붓의 정치학을 역전시키며, 나아가 색의 윤리를 우리에게 요청한다. 색은 우리에게 바라봄을 요청하지 않고 기다림을 요청한다. 색은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시간적 깨달음이되 윤리적 시간의 깨달음이다. 작가는 씻음을 통해 서구의 이성에 선취하는 색의 윤리를 조망한다.
이에 관련하여 러시아 출신의 위대한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의 시 「정물화(Nature Morte)」와 「T. S. 엘리엇의 죽음에 즈음하여(Verses on the Death of T. S. Eliot)」라는 시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장승택은 1987년 이래로 시인의 작품을 거듭해서 암송했고 창작에 많은 영감을 받았노라 고백하기 때문이다.
사물 하나. 그리고 그것의 갈색.
경계는 흐릿하고,
황혼 속. 아무것도 없다.
다른 건 없다. 정물화들.
해골, 뼈다귀, 손에는 낫—
이 어리석음은 죄다 거짓이다.
죽음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기에.
그리고 너의 시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 고요는 마치 연인이 다녀간 것처럼
죽음의 방문을 고스란히 반영하리.
진실은 이것이다:
“죽음이 오리라,
그런데 그녀는(죽음은)
존재와 시간, 사물과 감각의 경계를 성찰하는 내면적 시적 독백들이다. “사물과 사람들이 일어난다, 우리 사이에서. 사물도, 사람도 냉정하고 뚜렷하며 눈에 거슬린다.
문장으로 시작하는 브로드스키의 이 시는, 외부 세계의 운동이 정지된 듯한 침묵 속에서 감각과 언어가 겹치고 침전하는 상태를 그려낸다. 장승택의 회화는 이 시적 정적과 깊이 통한다. 겹겹이 쌓인 색의 층은 단순히 시각적 심도가 아니라, 시간의 누적이자 감정의 응축이며, 존재의 윤곽선이다. 작가의 회화는 색을 통해 사유하고, 침묵을 통해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듯 감각의 정치를 보여주는 장승택의 회화를 접할 때마다 에두아르 글리상의 투명성의 권리(right to opacity) 개념이 연상된다.
글리상은 타자성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것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투명한 상태로 인정하는 것이
장승택의 회화는 겹친 색의 불가사의한 조정과 조절을 통하여 우리에게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감각의 잔존’을 남긴다. 작가의 회화에서 색은 겹치고 스며들며 흐려지다 이내 반대로 더 뚜렷하고 깊어지다 은은해진다. 결국 파악되기를 거부하기라도 하듯이 물질이 사유의 영역으로 이동하여 작용한다. 그것은, 즉 작가의 칠함과 씻김을 오간 시간의 퇴적물은, 우리의 세속적 이해를 유보하며, 있는 그대로 순수한 감각으로 진입하기를 요청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장승택의 회화는 투명성의 역설적 윤리를 획득한다. 즉, 색은 투명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에 영원히 닿을 수 없다. 우리가 작가가 의도한 색의 의미에 도달하는 순간, 작가의 색은 작용하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회화는 영원히 진행되는 다이내믹한 균형(dynamic equilibrium)의 산물에 다를 바 없다.
또한 장승택의 회화를 볼 때마다 나의 뇌리에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직관 같은 게 있다. 주지하다시피, 장승택의 회화 세계는 애드 라인하르트가 제창했던 절대적 미니멀리즘, 혹은 절대 평면의 선언에 대한 응답처럼 보인다. 라인하르트가 ‘가장 마지막의 회화(the last paintings)’로 선언한 그 검은 회화(black or ultimate paintings)의 종결론(終結論)은, 회화가 더 이상 확장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역사 내에서 이보다 진화된 회화는 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장승택은 라인하르트의 그 ‘평면’ 위에 ‘겹침’을 제시했다. 장승택은 색을 통해 평면을 내부로 밀어 넣고, 감각을 통해 깊이를 만들어낸다. 평면의 절대성은 장승택에게 있어 회화 존재의 토대이자 그것을 넘으려는 제스처로 자기 존재를 재확인한다. 즉, 작가의 작업은 라인하르트의 말년 회화를 통과하되, 그 너머로 이끈다. 아까 말했던 이성과 감각의 평형, 초월과 일상의 평형, 남성과 여성의 평형, 사유와 감정의 평형, 삶과 죽음의 평형, 높음과 낮음, 고상함과 속됨의 평형이 그것이다. 작가에게 회화는 더 이상 자율적 오브제가 아니라, 관계의 지층이며 이성과 감각을 초탈한 유속(類屬)이다.
따라서 장승택의 겹회화는 반복되는 붓질과 겹치는 색채를 통해 감각의 윤리를 사유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것은 보이는 것의 미학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각의 형이상학이며, 기억과 시간, 타자와 존재가 서로를 부지(扶持)하는 지난한 관계 구조이다. 또한 이 전시는 장승택의 회화를 현대적 회화 언어의 재구성이자 나아가 동아시아 주변인의 미학이 서구 모더니즘의 중심에 결여한 무엇을 부지하려는 장구한 사유의 제안이라고 평가한다. 작가의 겹은 단지 색의 층이 아니라, 시대의 사유가 침전된 감각의 심연이자 그간 (미술의) 역사가 전해준 빛(시간)의 퇴적이다. 그리고 브로드스키가 「T. S. 엘리엇의 죽음에 즈음하여」에서 다시 말해준다.
그를 부른 것은 신이 아니라,
단지 시간, 그저 시간이었다.
젊고 거대한 파도들의 무리는
그의 비행이 남긴 무게를 떠맡아
꽃처럼 피어나는 가장자리 끝까지
그 무게를 실어 나르리라.
그곳에서 그것은
사라짐과 생성이 동시에 일어나는 이 감각적이며 동시에 이성적인 평면 위에서, 장승택의 회화는 형상이 아닌 시간의 존재론, 즉 빛의 퇴적으로써 우리 인식 너머에 이야기한다. 여기서 회화는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잠복한 시간의 침전물을 만지는 행위 그 자체가 된다.
1: Arthur Danto, The Transfiguration of Commonplace (New Heaven: Harvard University Press, 1981), pp, 107-111.
2: Amy Sillman, Isabelle Graw and Ewa Lajer-Burcharth (ed.), “On Color,” Painting beyond Itself (Frankfurt am Main: Sternberg Press, 2016), p. 111.
3: Martin J. Powers, “The Cultural Politics of the Brushstroke,” The Art Bulletin, Vol. 95, (2013), pp. 312-325.
4: Joseph Brodsky, Nature Morte 9절 : “The thing. And its brown color. Its outlines blurred. Twilight. Nothing around. Nothing else. Nature mortes./ Death will come, discover the body, whose calm will reflect death’s visit like a lover’s, with the same effect./ Skull, skeleton, sickle in hand – this absurdity, all lies: “Death will come and she will have your eyes”
5: 같은 시 1절: “Things and people arise/ Amongst us. And both are stark,/ and both are hard on the eyes./ It’s best to live in the dark.”
6: Benjamin P. Davis, Choose Your Bearing: Édouard Glissant, Human Rights and Decolonial Ethic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23), pp. 3-8.
7: Joseph Brodsky and George L. Kline, “Joseph Brodsky’s ‘Verse on the Death of T. S. Eliot,’” The Russian Review, Vol. 27, NO. 2 (Apr., 1968), p. 197.: “It was not God, but only time, mere time that called him. The young tribe of giant waves will bear the burden of his flight until it strikes the far edge of its flowering fringe, to bid a slow farewell, breaking against the limit of th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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