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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택의 회화-폴리페인팅(PoIy-Painting),회화의 피부

 

고충환 / 미술평론가

 

 1. 하이데거는 대지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예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 예술의 긍극적인 의미인 진리를 대지는 은폐하려는 반면 세계는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대지 속에 은폐돼 있을 때 진리인 것이며, 세계 밖으로 드러날 때 진리는 비진리로 전환한다. 어둠의 신비 속에서 진리는 존재 의미를 가지며. 빛의 광휘 속에서 진리는 주검과 형해(形骸)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주검과 형해로 드러난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플라톤식의 '상기(想起)' 해당된다. 진리 아닌 그 무엇으로서, 진리의 주검과 형해로서 진리를 상기 시키는.

 결국 예술의 관건은 지와 의미의 세계에 포섭되지 않은 채.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표상 세계 내지는 형상 세계에 붙잡히지 않은 채 진리를 자기 내부에 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어떠한 식으로든 지와 의미의 세계에 포섭될 때 진리는 진리로서 인식될 수 있으며, 표상과 형상의 옷을 덧입고서야 예술은 예술로서 지각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대지와 세계와의 비유적 관계 속에서 그 존재 의미를 찾는 예술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에 근거한 것임을 말해준다. 즉 예술은 진작부터 지와 의미의 세계에 포섭되지 않는 불구의 언어를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장승택의 작업은 적어도 외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표상과 형상이 지워진 지점에, 지와 의미의 지평이 무너진 지점에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형식이긴 하지만 감각적인 오브제로써 형식 이전의 무엇을 전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불구의 언어를 내장한 불가능한 기획에 근거한다. 여기서 표상과 형상이 지워진. 그리고 지와 의미가 무너진 지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일반적이고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그럼으로써 건네줄 수 있는 의미의 근거를 상실한 지점을 말한다. 객관이 죽고 주관이 사는, 객관 속에 함몰된 주관의, 주관 속에 함몰된 객관의, 주관과 객관의 지평융합으로 주와 객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점을 말한다.

 이렇듯 주와 객과의, 대지와 세계와의, 진리와 비진리와의, 미처 의미를 얻지 못한 의미 이전의 한낱 질료 또는 혼돈과 의미와의 모호한 경계를 작가는 중성적 공간 혹은 '아리까리한 경계' 라는 말로 지칭한다. 작가에게서 이런 아리송한 경계는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한 축이다. 그것은 작가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 그 자체이며. 객관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주관의 고집이며, 존재 의미인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모호한 경계에. 경계와 경계 사이에 거주하며 의미화 이전의 질료를 빛는다.

 이런 중성적 공간. 아리송한 경계, 의미화 이전의 질료, 형식 이전의 무엇은 작가의 화면을 지배하는 회색과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데올로기적인 성분이나 감수성(이 데올로기 가 곧 감수성이고, 감수성이 이데올로기의 한 표현이다)으로서의 회색은 작가로하여금 드러난 세계의 감각적인 현상을 의심하게 하며. 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갖게 한다. 실상 작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색채에 흰색을 부가함으로써 색채의 순도(선명도)를 조절한다. 이는 선명한 색채로 선명한 의미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작가의 욕구를 반영한다. 이로써 자기를 현재진행형의 자기부정 (회색으로써 순색을 부정하는)속에 세움으로써 긴장감을 유지 하려는 금욕주의를 실천한다. 사실 모든 회색분자는 세계의 감각적 현상을 의심하는 회의론자이고, 세계의 감각적 현상에 자기를 던지지 않는 금욕주의자이다.

 상식적으로 순색에 흰색이 부가되면 탁하고 불투명해지기 마련인데, 오히려 작가의 화면은 회색으로 인해 더 투명하고 맑은 색 감각을 띤다. 이런 사실은 다름 아닌 빛의 도입에 연유한다. 작가의 작업은 90년대 초반 이후 지금까지 이런 빛의 다양한 운영에 힘입고 있다. 파라핀. 왁스, 오일, 레진.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폴리에스테르 필름과 플랙시글라스 등의 소재들이 그렇다. 하나같이 빛을 완전히 투과하는 대신 빛의 함량을 자기 내부에 지닌 반투명 소재들이다. 이런 반투명 소재는 선명한 의미에 대해 불투명한 의미를 대적시키며 자기 방어적인. 소극적인, 수동적인 색 감각인 회색의 모호한 경계와 겹쳐진다.

 그렇다면 애당초 불가능을 내재한 진리란, 중성적 공간 또는 아리송한 경계란, 의미화 이전의 질료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이나 글로 명명할 순 없는 아우라를 말한다. 아우라란 말 자체에 종교적인 제의가 내재돼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수동적인 자기를 대질시키는 것을 말한다. 작가에게서 이런 절대적인 존재는 감각이다. 말레비치의 절대 형상으로부터 세잔파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형상, 그린버그의 평면, 주드의 최소한의 구조, 그리고 프리드의 즉물적(연극적) 오브제에 이어진 절대적인 존재를 가정한 일련의 계보가 회화 또는 예술의 자족적이고 궁극적인 원리에 바쳐진 것임에 반해. 작가에게서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감각은 이러한 회화 또는 예술의 자족적인 원리 외부로 미끄러진다.

 

 2. 장승택은 소통을 전제로 한 선명한 의미로 축조된 세계를 자기에게 불러들여 자기독백식의 불구의 언어 속에 섞는다. 선명한 형상으로 축조된 세계를 자기에게 불러들여 한낱 질료의 차원 속에 해체시킨다. 이런 일련의 자기화의 과정을 실행하는 도구가 감각이다. 감각으로써 세계를 중성적인, 회색의 모호한 지평 위에 다시 세우는 것이다. 여기서 감각이란 모든 화법이나 기법, 장르나 매체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요소 또는 능력을 의미하기보다는 세계를 자기에게 함몰시키는 어떤 절대치이거나 일종의 가설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지향으로서보다는 소재와의 치열한 대면 속에서 유래한 직접적인것이란 점에서 단순한 가설을 넘어선다. 즉 직접적인것이면서도 관념적인 지향을 관통하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인상과 인식, 지각이 함몰된 감각화한 화면이 가없는 바다를 보는 듯하며, 바다의 이마주가 현실 저 편의 감각의 절대치(글과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와 동격인 절대적인 존재를 상기시킨다. 현실 저편의 절대적인 존재와 맞잡는 유한 속에서 무한을 본(꿈꾼)낭만주의의 유산을 상기시킨다. 그런가하면 지척을 가늠할 수 없는 안개를 보는 듯하며, 안개의 이마주가 의식의 원형으로서의 무의식을, 기억의 윈형으로서의 망각을 상기시 킨다.

 또한 하루 중 형상이 이제 막 빛어지기 직전의 역동적인 한 순간을, 형상이 청명한 대기의 입자 속에서 여전히 습기를 머금은 채 미미한 알갱이로 간신히 존재하는 순간을 보는 듯하다. 색채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청색에. 약간은 병적인 보라색에. 상당한 용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투명하기만한 우윳빛에 해당한다. 시간으로는 새벽이 그렇다. 새벽은 어떤 색채가 아닌 일종의 색조(기미)이며, 색의 전조이다. 그리고 새벽의 투명하고 명료한 의식은 그 이면에 청색과 보라색과 우윳빛과 회색으로부터 유래한 우울한 감수성을 키운다. 불투명한 세계에 투명한 의식을 대질시키는 작가의 행위가 그 이면으로부터 수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작가의 화면은 무엇보다도 회화의 몸을, 살을, 피부를 상기시킨다. 투명한 우윳빛과 살색의 화면이 그렇다. 그래서 작가는 손을 옆으로 세워 회화의 몸을 쓰다듬기도 한다. 회화의 살 속으로 자기를 밀어 넣는다. 여기서 회화의 몸, 살, 피부는 얼굴과는 다르다. 얼굴이 어떤 정체를 지시하는 시지각적인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것임에 반해, 몸, 살, 피부는 모든 익명의 차이나는 것들 위에 펼쳐진 촉각적인 지평이다. 그래서 회화의 몸, 살, 피부는 여성적인 것이다. 작가 역시 회화를 '그녀'라고 부른다. 투명한 우윳빛과 살색의 피부를 한 그녀는 어떤 누군가로 이름불리는 대신 익명의 지평으로 작가 앞에 펼쳐져 있다.

 또한 화면에 난 구멍은 상처받기 쉬운 민감한 감수성을, 예민한 피부를 상기시킨다. 그런가하면 미세한 파동이 환기와 망각의 경계를 넘 나드는 기억의 습성을,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식과 지각의 습성을 떠을리게도 한다. 무엇보다도 회화를 정의하는 자기규정적 습성을 비켜가는 회화의 몸에 난 구멍, 균열, 허점, 허방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폴리페인팅(Poly-Painting)으로 정의한다. 폴리페인팅은 대략 중층적인 회화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중층적인 회화란 트레팔지나 플랙시글라스, 그리고 페인팅을 중층화한 것으로서, 모호한 경계를 겨냥한 실증적인 프로세스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이상에서 살핀 현상적 국면으로부터 관념적 국면에 이르는 회화의 모든 존재 의미와 그 반성의 성과가 포개진 이접적인 어떤지평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미지의 유산들 중 특히 모더 니즘의 자기반성적 회화의 유산이 함몰되는 어떤 지점을 의미한다. 그리고 작가는 회화에 몸, 살, 피부를 도구로 한 성애(性愛)적 욕망을 덧씌움으로써 이런 모더니즘의 자기반성적 회화를 변질시킨다.

 

2001 갤러리예 전시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