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

중성적 공간

-의식의 투명성을 위하여 무의식의 막장에서 퍼 올린 원형적 감성 쌓기

장승택

 

살과 가시

회가 먹고 싶다.

회는 부드러울수록 좋다. 나의 혀끝은 그 부드러움에 잘 길들여져 있다. 회는 또한 투명 할수록 좋다. 부드럽고 투명한 욕망의 회뜨기.... 그러나 이처럼 부드럽고 투명한 욕망의 자양분을 흠뻑 섭취한 나의 의식은 그만큼 부드럽거나 투명치 못하다. 나의 의식은 불투명하고, 때로는 음흉하고 습하며 독선적이고, 이유 없는 공격성을 띄기도 한다. 분노와 냉소의 냉.온탕을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린다.

또한 나의 의식이란 놈은 가끔 슬퍼할 줄도 알고, 아름다운 들판의 바람 앞이나, 저녁노을 지는 바닷가에서 밑도 끝도 없는 우울함을 삼키기도 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어떤 것, 그것은 아마도 나의 또 다른 배다른 자식, 무의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늘 투명하고 부드러운 의식과 함께 깨어 있고 싶을 때, 나의 서자 무의식은 회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가시처럼, 때론 캄캄한 숲 한 가운데서 느껴지는 어두운 나무등결의 당혹감처럼 저 밑바닥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다. 그 놈은 호기심을 등에 업고 두려움이 되어 다가온다.

두려움과 호기심, 이 모순된 이중구조 안에서의 회뜨기, 이것이 나의 진정한 작업행위의 의미인 것이다.

 

나와 보편성

어떤 이는 예술창조가 충동발산을 위한 하나의 대응물이라고 한다. 이 말에 어느 정도 순응한다면 예술행위는 일종의 억압과 승화의 두 간극사이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골 메우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재료(기호)들 상호간의 순전히 물질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의도적인 놀이인 작품이란 생산물 - 그 안에서 내가 겨냥하는 바는 물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재현은 아니다 -.

나의 작업은 완전히 주관적인 그 무엇을 가장 개인적인 표현방식으로 나타내려는데 그 의도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나의 작업은 나의 창조적 자질, 감각 그리고 기억 따위를 모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표현방법은 선천성, 자연발생적인 생각, 영감 등 무의식이나 무의식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과 유사한 형태를 통하여 나타날 때 더욱 독창적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내적 욕망과 감성의 표현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고 본다.

 

불, 문명의 기원 그리고 종말의 원소

나의 작업의 대부분은 불과 열에 의해 만들어진다.

4원소(물.불.공기.대지) 중에서 불만큼 두려움과 호기심의 상상력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원소는 없다. 우리가 유아기를 거쳐 사물에 대한 인식과 자기 판단이 설 때쯤인 유년시절에 가장 먼저 촉각적으로 뜨거움의 공포를 느끼게 하고, 반면에 그 현란함과 강렬함에 이끌려 위험을 무릅쓰고 불장난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사실은 이를 잘 증명해준다.

인간의 불의 발견은 인류 문명 발전의 시작이었으며, 인간이 동물과 확실히 구분되게 한 익힌 음식문화를 갖게 하였다. 그것은 부드러움의 문화이다. 모든 사물을 연소, 변형, 소멸시킬 수 있는 불의 힘과 시각적인 강렬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순수성!

한여름 밤 축제의 장작불 앞에서, 긴긴 겨울밤 따뜻한 화롯불 앞에서 그리고 사색의 촛불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들을 키워 왔던가? 그 앞에서 느껴지는 수세기를 달려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은 듯한 “내적 울림”의 보편성. 이 보편적 내적 울림의 원형을 찾아 쌓는 행위가 곧 나의 작업인 것이다. 태우기, 그을리기, 끓이기, 녹이기, 흘려 붓기, 굳히기, 또다시 녹이기....

불은 나의 작업 그리고 우리의 원형을 연결 시켜주는 촉매인 것이다.

 

체르노빌과 에트나 화산

예술은 항상 자연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예술은 자연을 다르게 복원하고 자연을 보다 위대하고, 보다 아름답고, 보다 진실 되며, 보다 직접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그 무엇”으로 만든다. 물론 그 아름다운이나 진실의 기준도 시대와 작가에 따라 변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체르노빌을 생각하며 분노한다. 단순한 두려움의 분노. 그러나 시실리섬의 살아있는 에트나화산을 떠올릴 때는 두려워하지만 분노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이로운 두려움인 것이다.

에트나가 아름다운 것은 그 중심. 핵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자연보다도 덜 인공적이고, 더욱 강하고, 더욱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꾸 회를 먹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길들여진 욕망이 아닌 중심이 확실한 가장 순수한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에트나는 살아 숨쉬고, 유동하고 늘 긴장한다. 그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며 모든 물질을 뒤섞고 용해하며 그의 열기와 가스는 모든 생명체를 질식시킬 만큼 강렬하다.

 

오라! 에트나여, 나에게로!

나는 꿈꾼다. 너의 자궁 안에서 질식하고 완전히 침묵하기를.

 

 

1993. 갤러리 서화 개인전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