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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피부를 지향하는 폴리 페인팅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장승택은 프랑스에 유학중이던 1990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연다. 전시명은 '가장 깊이 절망한 이들을 위한 모뉴멘트' 로서, 당시 서른한살인 작가가 27년 전 서른한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아버지에게 바친 전시였다. 이는 서른하나라는 나이를 관통하여 아버지에게 오버랩된 자신의 발견인 것이며, 그 발견은 다름 아닌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겹쳐지는 어떤 아이러니 같은 것이다. 이는 작가의 의식이 시 공간의 변화를 초월해 항구적인 것. 지속적인 것, 절대적인 것, 어떤 원형질 같은 것을 갈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여기서 절망은 변하는 것들에 대한 절망인 것이며. 그럼으로써 실상 변하고 절망 하는 자신을 기념하였던 것이다. 이런 인식은 차후 작가의 작업에 있어서 눈앞의 현상보다는 그 근원을 추구하게끔 관여하였을 것이다.

중성적 공간. 투명한 의식
 당시 작가의 작업은 이후 전개될 작업에 견주어 보면 평면의 페인팅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간혹 평면의오브제를 콜라주하는 식으로서, 대체로 그려진 그림 이라는 회화 본래의 의미에 충실하다. 그러나 페인팅이든 오브제이든 어떤 구체적 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 것은 아니며. 대신 우연적이고 회화적 효과에 의한 추상성이 지배적이다. 이는 마치 추상적 형상을 화면에 분방하게 풀어놓은 듯한 수묵 추상화를 연상케 하며, 일종의 내면 심상의 상징으로서 마치 존재의 두 축인 질서와 흔돈,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현장을 보는 것 같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저편으로부터 존재의 어둠을 견인해 낸 듯 자기 반성적이고 자기 관조적이다. 그리고 우연성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 부여와, 얼룩과 번짐 효과에서 소재가 갖는 물성에 대한관심이 읽힌다.
 작가의 작업에 있어 이런 소재가 갖는 물성에 대한 관심은 향후의 작업이 그리는 그림, 곧 일루전적 회화보다는, 만들고 구축하는 오브제적 회화로 선회 하는 계기가 된다. 회화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평면성은 여전히 유지되지만, 본래의 표면은 일정한 두께와 용적을 갖는 3차원적 입체 평면으로 변형되고,또한 소재가 갖는 물질적인 성질이 페인팅을 대체하게 된다. 따라서 특정의 재료가 갖는 물질적 성질에 대한 여타의 형식실험이 행해지는데. 이런 형식실험 은 주로 1990년 전시 이후부터 199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중성적인 공간'과 '의식의 투명성' 이란 주제하에 행해진 작업들을 살펴보면, 중성적인 공간이란 흔히 재현적인 회화에 수반되기 마련인 특정의 메시지나 의미를 결여한, 아무것도 의미 하지 않는 빈 공간을 뜻한다. 그리고 의식의 투명성은 정작 의식 자체보다는 무의식을 겨냥한 것으로서,무의식이 잠재한 회화적 감수성과 가능성을 지향하는 의식의 투명한 경계를 지시한다.
 이러한 의식의 투명한 경계는 레진(수지)과 파라핀(밀납)등의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소재의 물질적인 성질과 이에 따른 즉물성을 매개로 하며, 그 형상화의 과정에서 태우기와 그을리기, 끓이기와 녹이기, 흘려 붓기와 굳히기 등의 신체적 행위의 프로세스가 적극적으로 도입된다. 작가의 이런 행위는 마치 물과 불, 흙과 공기의 4원소를 조합하는 것을 통해 자신만의 자연을 꿈꾼 연금술사의 유사 과학을 상기시킨다. 이런 유사 과학적이고 몽상적인 행위를 통해 작가는 소재가 갖는 성질을 감각화한 것이다. 레진의 속이 비치는 투명성과 파라핀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촉각적 성질에 매료된 것이다. 소재가 갖는 이러한 투명성과 촉각적 성질, 그리고 소재에 접근 하는 신체적 행위에 대한 의미 부여는 작가의 이후 작업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빛과 색채의 응고             
 장승택은 이후 1994년에서 1995년에 걸쳐 레진이 갖는 물질적 속성인 투명성을 강화하고 정제시키는 작업에 진력한다. 레진 안에 색채를 응고시키는 방법으로 제작된 캔디형의 투명한 덩어리는 한눈에도 성제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플한 외관이나 소재에 내재한 물질적 성질, 그리고 무엇보다 평면과 입체와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즉물적 오브제-더 이상 평면이거나 표면이기를 거부하는, 벽면으로부터 돌출된 속이 가득 찬 물질 덩어리-가 미니멀 조각과의 연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은 미니멀 조각 특유의 논리적인 프로세스보다는 빛과 물질이 만나는 성질에 반응 한 감각의 산물이다. 색채 덩어리 또는 빛의 덩어리로 명명할만한 작업에서 색채와 빛, 그리고 물질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고 하나이다. 자기 내부에 빛을 머금은 물질 덩어리가 외부로부터 주어진 빛의 환경에 반응할 때, 단순히 물리적인 현상 이상의, 감각적인 현상 이상의 빛의 관념. 곧 빛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이런 정제된 형식에 비해 보면 종전 작업에서의 레진 덩어리조차 마치 가공되기 이전의 원료를 보는 듯하다.


회화의 단층
 그리고 1998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작업은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동안의 회화적 평면과 즉물적 오브제로 형상화한 덩어리 작업에 이은 박스형의 작업이다. 그 기본적인 형태는 패널에 반투명의 폴리에스테르 필름이나 컬러시트를 마운트 처리한 플랙시글라스를 중층화시키고, 그 위에 오일을 가하는식의 프로세스를 거친다. 이때 여러장의 플랙시글라스를 겹치게 되는데, 이는 곧 여러 층의 회화적 평면이 중첩되는 것이며, 이로써 회화적 단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작가가 이 작업에 폴리 페인팅(Poly-Painting)이란 말을 사용하여 중층화된 회화 혹은 회화의 단층을 지시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회화의 단층은 작가의 작업이 갖는 프로세스를 뜻하기도 하고, 나아가 미술사에서의 회화의 정의가 겹친 단층을 의미하는가 하면, 특히 회화적 평면에 천착한 모더니즘 회화의 영향사를 은유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작가는 플랙시글라스 표면에 오일을 가하는 방식으로 평면과 함께 회화의 본질이랄 수 있는 중첩된 터치를 내재화한다. 또한 손바닥을 칼처럼 옆으로 세운 상태에서 손등으로 마치 비를 쓸듯 채색을 가하는 방식에서는 보다 촉감적이고 감각적인 신체의 행위를 작업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판화용의 소형 롤러를 사용한 화면은 마치 전면균질회화 를 보듯 일정한톤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 자체로 순수의식, 혹은 순수감각, 혹은 순수관념을 상기시킨다.
 이렇듯 외관상 비슷해 보이는 화면은 실상 그 이면에 다변화를 위한 작가의 치열한 시도를 내재하고 있다. 이런 시도는 단순히 화면에 변화를 주기 위한 것 이상의, 빛과 색채 그리고 물질이 만나는 미묘한 변화에 작가의 감각이 반응한 결과이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화면의 표면으로부터 내부로 함몰된 물의 미세 파동을 보는 듯한 일종의 드로잉 개념의 커팅 작업을 시도한다. 이런 미세 구멍은 일정한 용적을 갖는 박스형의 입체화면, 그리고 화면의 내부를 투과하는 반투명의 색채와 함께 회화적 평면을 일정한 프레임 속에 갇힌 액상(액상)의 화면 으로 변형시킨다. 이런 액상의 성분과 구멍은 현실 을 자기 내부로 빨아들이는 비현실, 의식을 자기 내부로 불러들이는 무의식, 기억을 자기 내부에 합몰시키는 망각의 샘을 상기시킨다. 또한 모든 변하는 것이 비롯되는 지점이지만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원형을 보는 듯하다.
장승택의 작업에 있어서 핵심은 무엇보다도 화면의 내부를 투과하는 듯한 반투명의 색채이다. 이런 색채 감각으로부터 특유의 아우라가 발산되는 것이다. 그 색채는 단순히 화면의 표면에 얹힌 것이기보다는 화면의 내부를 관통한다. 이렇듯 물질의 내부를 관통하는 색채는 실상 빛의 성질이나 다름없으며, 파라핀이나 레진 덩어리, 그리고 중층화된 플랙시글라스의 반투명 소재가 빛을 내재화한-자기 내부에 빛을 가두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색채와 빛 그리고 물질이 혼연일체를 이룬 하나의 덩어리로서 전해진다. 이렇듯 그 자체 빛이기도 한 색채에 대한 작가의 감수성은 사물의 내부를 훤히 투과하는 투명한 빛 - 진리에 대한 맹신과 감각적 현상에 대한 신뢰를 상징하는-과, 사물의 표면에 작용할 뿐인 불투명한 색채 -대상을 표면과 이면으로 구분하고 단절시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상징하는-와의 경계에 위치한다. 작가는 이런 경계를 '아리송한 경계' 로 지칭한다. 여기서 아리송한 경계란 색채와 빛의 물리적 현상을 지시하는가 하면,색채와 빛으로 상징되는 심의적인 경계를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색채와 빛의 현상에 반응하는 작가의 감수성을 의미한다.

 작가의 감수성을 색채에 비유하면 상당한 용적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투명해지는 빛으로서, 내향적인 반투명의 맑은 우윳빛에 가깝다. 이런 우윳빛은 사물을 자기 내부에 거둬들이는 관념적인 색채와도, 감각적인 현상을 좇는 현란한 원색과도 구별된다. 대신 우윳빛은 특유의 모호한 경계로 인해 섬세한 감수성에만 반응한다. 예컨대 그것은 '대지와 맞닿은 새벽녘의 하늘빛'이나 '일식 때의 태양 언저리 빛' 혹 은 '성숙하지 않은 소녀의 길지 않은 가운데 손톱의 투명한 빛' 에서처럼 잠재적인 세계 - 현상적인 세계와 비교되는 -가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최소한의 단서나 암시 같은 것이다. 그것은 드라이한 회화의 평면 혹은 표면을 액상적이며 촉감적이며 심지어 육감적이기조차한 회화의 피부로 전이시킨다.

 


"나는 엄밀한 의미의 모노크롬 회화를 그리지 않는다.
또한 결코 한가지 색으로만 작업하지도 않는다.
나는 수지 안에 색채를 응고시킨다.
여기서 빛과 색채는 수지에 의해 하나의 몸체가 된다.
이는 물체 스스로가 자신의 빛을 발한다는 것을 믿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이 비극적인 것은
대상 안에 응고된 세계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온화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전혀 평온하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억제된 세상이 새로이 곧 폭발할 것만 같은 현대적 의미의 판도라의 상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장승택은 1959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1986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국립 장식미술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파리 1대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개인전 11회, <예술과 공간전>(갤러리현대2001),<회화의 복권전>(국립현대미술관2001),<한.일 현대미술의 단면전> (광주비엔날레2000),<일본 앙데팡달 50회 기념 특별전>(일본 도쿄도미술관1997),<도빌 현대미술제>(프랑스 도빌 1994)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가했다.

 

2002 잡지 'art in culture' 기사